팔정도
① 정견(正見)입니다.
정견(正見)이 문제입니다.
정견(正見), 진정한 부처님의 사상, 진짜 불교에서 보는 우주관, 인생관입니다.
이 우주와 이 세계, 우리 인간들을 포함한 유정들이 어떻게 해서 왔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렇게 살고 죽고, 이걸 또 반복하고, 윤회를 한다고 하는
그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견(正見)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건 벌써 사도(邪道)입니다.
정견(正見)이 확립 되어야 됩니다.
정견(正見)이 뭐냐? 연기(緣起)의 원리입니다.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이 기세간(器世間), 이 우주 삼라만상, 이 세상은 많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나고,
유지해가다가 사멸해갑니다. 이것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유정은, 우리 인간들은 자유 의지가 있어서 인연의 도리와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나고 죽고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연기의 원리(緣起의 原理)라고 합니다.
연기의 원리 또는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합니다.
이 연기의 원리는 바로 법이올시다. 진리입니다.
부처님 나기 이전부터, 시공(時空) 이전부터 미래제가 다하도록
오직 연기(緣起)의 원리가 있어서 우주만물을 지배하고,
그것 때문에 우주만물은 굴러갑니다. 이게 연기(緣起)의 원리입니다.
이 연기(緣起)의 원리, 이것은 정말 깊이 봐야 됩니다.
불과(佛果)를 증한 분상에서 이 연기의 원리를 압니다.
이 연기법에 따라서 지옥도 있고, 하늘도 생기고, 인간세계도 생기고,
아수라, 아귀 축생 등 여섯 세계가 벌어집니다.
육도를 벗어난 니르바나의 세계도 벌어집니다.
이것은 업을 짓다가 ‘아! 이것이 참 된 길이 아니구나.
착하게 살아야 되겠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해서 찾은 결과의
세계입니다. 천상천하에 부처님같이 거룩한 분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의 원리로 정견(正見)을 삼으라고 한 그것에 의해서
인과(因果)과 소중함을 알고, 모든 것이 인과법(因果法)이라고
우리 사람들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좋은 결과가 와요.
나쁜 짓하면 반드시 고통의 결과(과보)가 옵니다.
부처님은 무량겁 전에 이것을 아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중생이었을 때에는 정견(正見)을 체득하지 못했지요.
그러나 성품자체가 대단히 착하고 진실했었기 때문에 착하게 사셨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갔어요.
지혜를 닦아야 알아요. 그런데 어떤 큰 깨달음, 더 큰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서 헌신할 줄 아는 이타행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보살행과 공덕 닦기를 백 생, 천 생, 겁, 몇 천겁,
몇 억겁을 하시고 나서 불과(佛果)를 증하신 거예요.
불과(佛果)를 증하시고 보니까 있는 것은 연기(緣起)의 이법이어.
하나님은 우상이야. 그래서 팔정도(八正道)가 나옵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합니다.
정견(正見), 그러니까 연기의 원리, 이 연기(緣起)라는 것은
정말 우리 불교의 근본사상입니다.
초전법륜하신 그 사제 팔정도(四諦八正道), 팔정도(八正道)는
이 행동 실천의 핵심 덕목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교설은 이 정견(正見)으로부터 나옵니다.
정견(正見)으로부터 나와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에서 나와요.
이것은 진리(眞理)요 법(法)이어요. 오늘 팔정도(八正道)를 한 시간에
이야기하려니까 조금 어렵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든 현상계의 만유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하나도 독립됨 없이 서로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인연생기(因緣生起)하고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아주 깊은 이야기입니다.
본래 없는 마음, 마음은 본래 없어요.
이 마음은 아무 형상도 없고, 맛도 없고, 만질 수도 없어요.
이름 하여 마음이라고 한 거예요. 해와 같이 밝아. 시방에 두루합니다.
온갖 법이 인연으로 좇아 일어나는 지라, 환상 같아서 실체가 없어요.
이것은 체(體)로 설명한 것이고, 용(用)으로 설명한 것이 연기(緣起)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중생들이 사는 이 우주와 세계는,
기세간(器世間)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을 영원히 반복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을 다시 부연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반복한단 말이에요.
영원히 그래요. 여러분! 영원히 죽지 않아요. 여러분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윤회한다고 하면 반드시 기체(基體, 本體)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지금 불교에서 이걸 몰라요. 힌두교에서는 알았어요.
힌두교한테 무아(無我)라고 공격하다가 결국은 당했어요.
기체(基體)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윤회하는 거예요.
그 윤회하는 기체(基體)를 우리 영산불교에서는 영혼체라고 합니다.
그 영혼체는 1,2,3,4번으로 되어 있어요. 오늘 설명을 빨리 합니다.
이건 시간이 없어서 설명을 많이 할 수가 없습니다.
1,2,3번 영체는 영원히 뭉쳐가지고 죽지 않아요. 본체는 1번 영체이어요.
이것만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무아(無我)가 왜곡 되어 버렸어요. 나(我)도 없고, 너도 없고,
모든 것이 없다고 해석해버려요.
그걸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하지요. 이거 큰일 날 일이어요.
지금까지 부처님의 말씀을 이렇게 왜곡해가지고 왔어요.
현상계의 만유는 인연의 도리와 인과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의 만유는 모두 연기의 원리에 따라 굴러가는 것이지
태초에 하나님이 있어서 창조 되어진 것도 아니고,
그분의 뜻에 따라 운명이 정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견(正見)이라고 하면 ‘바로 보라’하는 거예요. 바로 보기 어려운 거예요.
바로 보려면, 나중에 여덟 번째 덕목인 정정(正定)이 나옵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되요. 그래야 바로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는 사물을 바로 못 봐요. 왜냐하면, 탐진치 삼독이 있지요, 습이 있지요,
업장이 있지요, 빙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대상을 정확히 통찰 못합니다.
저것을 전부 거둬버려야 되요. 그러면서 삼매에 들어가고,
그래야 밝은 지혜가 나오고, 또 열심히 지관수행을 해가지고
삼매도 더 깊은 삼매에 들고 해서 불(佛)의 경지에 가야 영체를 봅니다.
이 육안으로는 안 보여요. 천안으로도 안 보여요. 혜안으로도 안 보여요.
그래서 부처님은 정견(正見)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육신을 먼저 바로 보아라.” 우리는 이 육신을 깨끗하고 귀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보잖아요. 그러나 우주 법계의 주(主)이신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 몸은 그렇게 깨끗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바로 보아야 돼.
더럽고 부정한 거예요. 알지요? 여러분, 몸뚱이가 깨끗합니까? 부정한 거요.
모든 걸림에서 떠나서 볼 줄 알아야 돼.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어.
모든 재앙과 고통의 근본이어. 고(苦)의 그릇이어. 고통(苦痛)의 그릇이어.
이렇게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낙(樂)으로 보지요. 그러고 살아.
그러나 부처님은 모두가 고(苦)의 종자로 봐버리는 거예요.
고(苦)의 과보(果報)로 봐버려요.
“낙(樂)으로 보지 말고 고(苦)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우주만법은, 산하대지(山河大地) 일월성신(日月星辰) 금수초목(禽獸草木)
유정무정(有情無情) 할 것 없이 영구히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
결국 모두가 공(空)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것으로 잘못 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 물심양면에 현상으로 나타나는 우주만유는
하나도 상주불멸 하는 것은 없고 변화무상하다는 이치를 알아야 된다.
무상(無常)을 말씀하신 거예요.
▸그 다음, 우리는 우주만유의 모든 법이 각각 나(我)라는 존재가,
실체라는 존재가 분명히 있다고 보지만,
부처님은 모든 것은 지수화풍 내지 육대(六大, 만물을 생성하는 여섯 가지 요소.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 공대(空大), 식대(識大)를 이른다)가
일시적으로 모여지고 흩어지는 것으로 봐.
그래서 그 무엇이 나(我)라고 하겠는가. 고정 불변하는 나(我)라고 하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 본 것이다.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것이어요.
다시 말해서 우주만유, 물심, 유정 무정을 막론하고 다 부정하고 괴로운 것이오.
모두가 공(空)으로 돌아간다. 또한 허망 무상한 것이고 실체적인 나(我)가 없어.
무아(無我)여. 이렇게 보는 것이 우주관이고 불교의 인생관이란 말이어요.
이것이 정견(正見)이어요. 여기서 시작해야 되요.
여기까지는 정립해 놔야 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꿰뚫는 정견(正見)은 앞에서도 말씀 했지만,
깊은 부처님 삼매 속에서만이 가능합니다.
방금 말씀했지만 이 세상 현상계에 대한 올바른 네 가지 진리 즉,
고(苦) ․ 공(空) ․ 무상(無常) ․ 무아(無我)라고 해.
이 네 가지의 진리, 네 가지의 정견(正見)을 사정견(四正見)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내세운 이 정견(正見), 이것을 우리가 꼭 배워서 정견(正見)을
확립해 둬야 됩니다. 이 거짓 몸뚱이까지 보면 이 세상은
부정 ․ 고(苦) ․ 공(空) ․ 무상(無常) ․ 무아(無我)예요. 이게 정견(正見)이어.
출처:2010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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