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붓다의 메시지

붓다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신다

보석공주 2017. 9. 11. 14:13

붓다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신다


※근원적인 의문

먼저 삼계의 지존이시고, 미래제가 다 하도록 남섬부주의 대교주이시며,

구원실성하신 최초불 석가모니부처님과 역시 삼계의 지존이신

다보탑 속 다보여래부처님과 오여래부처님이후

모든 붓다들의 스승이신 대지 문수사리보살님께  오체투지하면서 귀명하나이다.

 

내나이 20세 안팎 , 약관의 나이에 인생의 생사문제에 대하여 근원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사후 세계가 있는 것인지,

있다면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지옥 천당 극락 등과 같은 것인지,

불교의 윤회전생이란 진실인지 등에 이르기까지 몹시도 알고 싶었습니다.

 

선에서 말한대로 번뇌망상에 시달리면 그 자리가 지옥이고 따로 지옥이란

없는 것인지, 과연 마음이 부처인지, 마음의 본성을 깨치면 붓다가 되는 것인지,

붓다가 된다면 어찌 되는 것인지,

대열반에 들면 공 그자체가 되어 버리는 것인지, 또한 공이란 과연 무엇인지,

우주와 하나로 계합한다는데 구체적인 뜻은 무었인지.....

도무지 의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생의 의문에 대하여 깨치고 싶어 몸부림친것이 출가하여

중이 된 동기였습니다.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있어서 만물을 창조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떤 비 인격적인 원리, 이법에서 만물이 생겨난 것인가?

화두타파하면 마음 자리를 깨우칠수 있는 것인가?

마음바탕을 깨친다면 어떻게 해서 나고 죽는 생사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윤회를 벗어나고 삼계를 뛰어 넘는 것이 가능한가?

확철대오한 선사들은 어느 수준에 도달한 것인가?

부처님 이후의 전등조사들도 성불정도로 보아야 하는가?

붓다의 위신력은 어느 정도인가?

불교 교의의 특색은 무아사상이라는데, 중생이 윤회전생을 한다면

그 윤회의 주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아닌가?

 

이런의심들을 타파하지 못하고서는 살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아서

몇몇 큰 시험도 합격해 놨으나, 결연히 집을 뛰쳐나와 도를 깨치고자

불문에 들어 왔습니다.

승려가 되어 두루 부처님 경전을 읽고, 사유를 거듭하다가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큰스님 문하에 들어가 '이뭣고' 화두를 받아 참구하였습니다.

 

※견성오도

의심하는 이놈은 무엇인고?

회광반조 10여 년만인 7월 어느날,

생각을 놓아도 저절로 화두가 들리길 여러 날 동안 이어졌습니다.

 

답답함이 부풀어 올라 풍선같이 극치를 이룰 즈음, 큰소리로<금강경>을

봉독하는데,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바도 없고, 또한 가는데도 없다" 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온몸이 폭발하듯 하면서 세상이 확 뒤집혔습니다.

 

주와 객의 벽이 무너져 버리고, 툭 터져 허공같이 비었습니다.

적조요, 만고의 광명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어서 가고 옴이 없고 여여부동 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나는 저절로 일어나,

실로 법열이 어떤것인가를 실감하면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겁생의 업의 나무 무성하더라.

팔만사천 가지마다 줄기마다

망상꽃이 피었더라.

내 이것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더니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

거짓몸뚱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 되어 없는데

착할게 어디있는가.

마음 마음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네.

 

이것이 벌써 30여전의 일입니다.

마음의 본래면목, 존재의 진상, 우주의 체성을 확실히 철견 할수 있었던 것은

오매불망 간절히 의단을 쌓아온 나의 정성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불선으로의 회귀

 

돌계집의 겁외가와 동산수상행을 말하고 덕산의 30방을 흔들며,

 

상에 집착없는 언어로 공을 읊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 다된양 착각하여

 

오만을 떨었던지난 날을 생각하며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0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상임포교사로서 불법을 포교하기 위해

 

법상에 앉은지 채 2~3년도 못 되어 나의 공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히말라야 초인들, 흰두교 성자들 및 티베트 밀교의 성자 미라래빠의

 

수행담을 접하고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을 정독하면서

 

나의 선 수행을 비교, 점검해본 결과

 

중대한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성을 깨치는 것은 공부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견성이 곧 성불’ 이라는 선가의 기치는 분명코 잘못됏으며,

 

설사 견성하고 나사 보림을 마친다 하더라도 곧 붓다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거룩하시고 희유하시며 거의 절대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또한 인간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 아라한에 그칠 뿐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라한으로서는 우주와의 계합이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 했습니다.

 

실존철학의 소위 존재가 드러나서 머무는 것은 순간일 뿐입니다.

 

영원히 우주와 계합을 이루는 성불만이 완벽한

 

생사해탈을 보장합니다.

 

소위 견성에 이름으로써 저 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상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창조주란 없다!’고 선언하는

 

단계가 바로 견성의 경지였습니다.

 

이경지에 이르면서 이 몸뚱이란 4대로 이루어진 옷이나 집과 같은

 

‘가짜 나’라는 것과, 나라는 것도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연

 

소생의 가아이며 이 세상은

 

꿈이나 그림자 또는 이슬과 같은 무상한 존재라는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분별하고 사량하는 것은 생각일뿐, 마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것만해도 크나큰 깨침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지이전, 곧 부처님 나기이전의 적멸과 우주가 생기기이전의

 

면목을 깨친 이라면 당연히 불교의 연기법만이

 

진리라는 것을 사자후할 것입니다.

 

내가 갑자기 염불선 공부로 용감하게 회귀할수 있었던 것은

 

<화엄경> <입법계품>, <법화경> (본문 팔품)에서 가르친대로

 

무엇보다도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하는

 

수행만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토삼부경>에서 수행인이 생사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경전읽고 염불하는 것만이 우리가 보다 잘 살수 있는

 

오직 하나의 대안임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나는 인도의 용수, 마명, 보살, 중국의 혜원조사, 진의 각현,

 

담란, 천태 지의, 선도, 도작, 영명 연수 선사, 한국의 의상,

 

원효 큰스님, 서산 선사의 염불선을 크게 주목하면서

 

우주생명의 실상을 관하며 보림을 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모의 젊은 여인을 보고 마음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진여실상이라는 용광로에 무명 번뇌나 억겁의 죄장

 

따위가 모조리 녹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고

 

주장했던 지난 날의 나의 법문을 스스로 반추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일도 있었습니다.

 

혼자 산행을 하던 중 쉬어갈 만한 곳에서 선정에 들었습니다.

 

그 선정 중에 문등병을 심하게 앓고있는 있는 남자가 들어와

 

한 이불 속에서 자고, 밥 지어 먹고 지냈을 때,

 

정말 선정에 들었으면서도 중생심으로 돌아가 역겹고 싫은 생각이

 

줄곧 따라붙고 있었습니다.

 

또한 태백산의 토굴에서 보림하던 어느 여름 날,

 

커다란 구렁이가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긴장하여 진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보면서 본래면목의 실상, 진여 자성을 철견하고

 

보림한다고 해서 붓다가 될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백생 이전에 수행하실 때에 ‘가리왕’ 이라는

 

포악한 악인을 만나 난자당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에게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일어나지 아니하셨는데,

 

도대체 나는 어디쯤 와 있단 말인고?

 

결국 인간 능력의 한계라는 명제와 타력,

 

곧 ‘부처님의 가피’라는 주제를 두고 차츰 골똘히 생각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깊은 선정에 들어서 그것을 진짜 삼매라고 오해한

 

나머지 불.보살을 뵙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친견은 고사하고 지옥.천상세계도 관할수 없었습니다.

 

또한 윤회를 벗어난 해탈오계도 곧 도솔정토나 서방극락세계도

 

끝내 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승이었음에도, 이 모두가 실제로 존재할것이 라고

 

믿었기 때문에 염불선으로 과감히 방향 전환 하였으나

 

특히 1970년대

 

당시의 한국 불교에서는 선 수행이 강조되다 보니,

 

염불하는 행자들을 무조건 외도로 몰아 배척하였기 때문에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고 침묵 속에 정토업을 쌓았습니다.

 

또 하나 내가 염불선으로 방향 전환을 결심한 데는,

 

선재동자와 같은 나의 과거 행각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처럼

 

나이와 성별, 출가.재가를 가리지 않고,

 

이단을 이해하고 오랜 세월 교유함으로써 선의 참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무아 속 삼매에서 붓다를 뵙다

 

2001년 1월 어느날, 오직 염불선으로 수십 년 간

 

남몰래 각고 정진해온 덕분에 나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이끌려, 드디어 무아 속 삼매에 들었습니다.

 

그때 친히 들은 부처님 말씀 일부를 소개합니다.

 

“부처님은 마음 밖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마음 안에 계시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들은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신다.

 

마음에는 안과 밖이 없다.

 

가고 옴 없이, 움직이지 않고 여여하듯

 

부처님 또한 그리 계신다.

 

다만 중생들이 분별하며 있다 없다 할 뿐,

 

부처님들은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신다.“

 

그때 내가 오래 전 과거의 생에서 이미 아라한과를 얻었고,

 

석가모니부처님 영산 당시에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한 존자로서

 

상품보살지에 올랐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화엄경> (십지품)에서는 “보살이 제구 선혜지에 오르면

 

큰 삼매의 힘으로 부처님들을 뵙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다.” 고 했습니다.

 

마침내 억겁의 시간동안 이루고자 했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로 보고 들은 보살.붓다 세계의 그 많은 소식들은

 

이만 접어야 겠습니다.

 

밀장이기에 함구해야만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화두를 타파한 내가 염불선으로

 

방향 전환 한 것을 두고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희’라고

 

무릎을 치며 찬탄한답니다. 그 사이 거쳐간 수행 과정

 

과 관문들은 부처님 세계의 기밀이기 때문에 일일이

 

밝힐수는 없지만 무아 속 삼매에

 

들어 읊은 나의 노래를 소개할까 합니다.

 

비었어라 비었어라

 

삼천대천세계가

 

비었어라

 

먼지 하나

 

티끌 하나 없는

 

공의 세계

 

맑고 깨끗한

 

청정 자체

 

환희 환희

 

환희인 것을

 

-2001년 1월 13일

 

마침내 적정삼매를 통과하여 부처님의 인가를 받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인가가 떨어졌던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1>>